함께 읽고 싶은 시

뚜껑을 따다/노재순

시간의 마시멜로 2026. 3. 26. 18:12


뚜껑을 따다

노재순


매화꽃 소식이 봄의 뚜껑을 따자
마당가에 내걸린 솥뚜껑이 뒤집어졌다
솥뚜껑이 돼지비계를 먹고
번철이 되는 날은 동네 잔칫날이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뚜껑들이 있을까

보도블록 틈새에 핀 작은 제비꽃 한 송이가
보랏빛 시의 뚜껑을 따고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의 뚜껑을 딴다

오늘은 부모의 뚜껑을 벗은 한 남자가
베트남 어린 신부를 맞는 날
잘 익은 항아리 뚜껑이 열리고
병뚜껑이 늘어날수록 달빛도 흥청거렸다

아직도 순서를 기다리는 미혼의 뚜껑들
이미 따 버린 뚜껑들
자신을 다 비워내고 쪼그라든 뚜껑들까지

저녁의 뚜껑을 따고 아침이 오고 있다

           
시집 <꽃으로 묶어둔 시간> 2023년 현대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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