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깊은 것은 슬프다
이채민
비 내리는 오후
창경궁 명정전 꽃살무늬 창 앞에서
비를 피해 들어온 참새와 마주쳤다
녀석은 비에 젖은 내 모습을 강중거리며 살핀다
모든 시작이 그렇듯이
키를 낮추고 눈을 맞추고
서로 죽지를 부비는 사이
늑골 밑에서 맑은 샘물 소리가 났다
제 족속이 아닌 나를 받아준 녀석이 고마웠다
잠시, 풍경이 흔들리고
흔들리는 얼굴과 그 이름이 포개지고
그가 키운 깊고 포근했던 목화가
망국의 아픔을 기억하는
궁궐 뜨락에 하르르 떨어진다.
인적 없는 명정전 긴 회랑을 돌아 나왔을 때
녀석은 가고 없었다
회랑을 감아 도는 빗줄기가 몸을 죄어온다
날개도 우산도 없는 허탈한 슬픔이
목이 메게 깊다는 것을
날아가는 그를 비워내며 알아가는 중이다
< 동백을 뒤적이다> 현대시 시인선 114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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