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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인연/노재순

시간의 마시멜로 2021. 10. 25. 19:57

 

 

특별한 인연

 

노재순

 

 

  동구릉은 동쪽에 있는 아홉 기의 능으로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가 잠들어 있다.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의 건원릉, 문종의 현릉, 선조의 목릉, 현종의 숭릉, 최장수 왕으로 재위 기간이 52년이나 되는 조선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영조의 원릉이 있다. 효명세자는 익종 문조로 2번이나 추존되어 수릉에 모셔져 있고 아들 헌종의 경릉도 함께 있다. 1대에서 24대까지의 조선 역사를 오롯이 품고 있는 곳으로 단릉 쌍릉 동원이강릉 합장릉 삼연릉을 모두 돌아볼 수 있다.

 

  구리로 이사 온 특별한 이유에는 동구릉의 영향도 크다. 차로 10분 거리에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가 숨 쉬는 최대 규모의 왕릉이 있다는 건 너무나 큰 자랑이다. 오랜 시간을 품고 있는 소나무와 잘 관리된 숲길은 사계절 언제라도 너무나 좋다. 숲 사이로 개울물이 흐르고 온갖 새들이 노래한다. 뭉게구름도 소나무에 걸터앉아 망중한을 즐긴다. 시간만 나면 산책하듯이 들리는 동구릉은 나의 숨겨둔 힐링 장소다. 차 막히고 인파에 치이며 휴가를 따로 갈 필요도 없다. 언제라도 스토리를 따라가며 역사 속 인물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며 나를 돌아보는 귀한 시간이다.

 

  9기의 왕릉을 천천히 둘러보며 가지를 치다 보면 조선 역사의 대부분을 이해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5대 문종과 현덕왕후가 잠들어 있는 현릉이다. 아버지 세종을 보필하며 29년 동안 세자의 자리에서 성군의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도 재위 2년 만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돌아가셨다. 단종은 왕세손 왕세자에 이어 12살의 어린 나이에 수렴청정도 없이 홀로 왕위에 올랐다.

눈도 감을 수 없었던 문종은 죽어서도 자식과 멀리 떨어져 있다. 애타는 그 마음이 내 발길을 붙들어 세우며 우리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고향이 영월인 나는 누구보다 더 많이 알고 있기에 궁금한 모든 것을 들려준다. 장릉과 엄흥도에 대한 얘기도 들려주고. 청령포에서 단종의 울음소리를 들었다는 관음송과 한양을 바라보며 쌓은 노산대와 망향탑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전해준다. 노산군에서 단종으로 복위시켜준 숙종이 고맙다고 함께 마음을 나누기도 하고, 아들이 지은 자규시를 읽으며 우리는 눈물짓기도 한다. 열일곱 살 지금의 고등학생이었던 단종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원통한 새 한 마리가 궁중을 나오니/ 외로운 몸 그림자마저 짝 잃고 푸른 산을 헤매누나/ 밤은 오는데 잠들 수가 없고/ 해가 바뀌어도 한은 끝없어라/새벽 산에 울음소리 끊어지고 달이 흰 빛을 잃어 가면/

피 흐르는 봄 골짜기에 떨어진 꽃만 붉겠구나/ 하늘은 귀 먹어 하소연을 듣지 못하는데/서러운 이 몸의 귀만 어찌 이리 밝아지는가

 

  장례도 치르지 못한 단종은 승하한 지 550년이 지나서야 2007년 영월에서 국장이 치러졌다. 단종대왕으로 모시면서 단종제를 올리기도 하고 지역 문화행사로 잘 이어가고 있다고 안심도 시켜 드린다. 고향 내려가서 전해줄 사연도 한 보따리 챙기다 보면, 어느새 소나무들은 노을에 젖어 주름진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든다. 내가 구리 시민으로 살게 된 인연도 어쩌면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산꼬라데이 화전마을에서 단종은 그냥 친구 이름처럼 듣고 자랐다. 죄인 아닌 죄인으로 쫓겨와 결국 사약까지 받고 죽었으니 당연히 미안한 마음도 갖게 되고 같은 편이 되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풀리지 않는 먼 귀양지에서 얼마나 한양으로 돌아오고 싶었을까? 얼마나 부모님 곁에 오고 싶었을까? 궁궐에서 백리 안에 자리 잡는다는 조선 왕릉인데 아직도 해배의 발길 풀리지 않고 홀로 떨어져 있다.

이렇게라도 단종의 마음을 대신 전할 수 있어 참으로 기쁘다. 문종과 현덕왕후의 애달픈 마음을 받아 들고 고향 가는 길은 늘 뿌듯하다.

조선 역사상 세종 문종 단종의 적장자로 이어지는 강력한 정통성에도 가장 불행한 왕으로 남은 단종, 그들이 이루지 못하고 미완으로 남은 역사의 오솔길을 걸으며 생각해 본다. 만일 문종이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성군이 되어 함께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 부국강병을 이루지 않았을까? 전란으로 백성들도 고통받지 않고, 감히 누구도 넘보지 못할 통일된 한반도 지도를 그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역사는 과거에 잠들어 있지 않고, 미래의 대한민국이 펼쳐나갈 깨어 있는 지침서다. 시대의 소명으로 최선을 다해 조선이라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생을 바쳤던 문종, 세종의 모든 업적을 함께 연구하고 만들었던 가장 훌륭한 세자가 아니었을까? 동구릉은 역사 속에 잠들어 있는 왕들을 만나면서 그 시대를 이해하고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간 여행이다. 사연 따라 또는 업적 따라 좋아하는 인물들을 만나,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나누는 속 깊은 대화는 무엇보다 값진 특별한 시간이다. 때로는 몽진으로 인한 자격지심과 임오화변으로 천추의 한이 된 아비의 사연에도 귀를 기울여본다. 다시 시간을 되돌린다면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왕으로 살았던 그들의 빛나던 용안보다는 보이지 않는 고뇌를 읽으며 더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한 시대의 중심에서 최고의 통치자로 살았지만 일월오봉도 뒤편에서의 삶도 과연 행복했을까? 수많은 격무에 시달리며 천재지변마저도 본인이 부덕한 탓으로 돌렸다. 어려서부터 맞춤교육으로 본인의 적성과 상관없이, 살아남기 위해 왕도를 걸어야 했던 거부할 수 없는 그들이야말로 가장 힘없는 사람은 아니었을까? 조선의 시간과 대한민국의 시간이 다르지 않듯이 그때의 사람들 또한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삶을 돌아보며 공과를 떠나 인간적인 연민으로 바라보며 위로하고 싶다. 시대의 격랑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최선으로 살아냈으니 편히 쉬시라고....

돌아보면 600년 전의 궁궐은 언제나 풍랑에 출렁이는 섬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수수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맺어진 특별한 인연, 문종과 단종의 마음을 이어주는 오작교가 되고 싶다. 앞으로도 계절마다 다른 얼굴로 반겨주는 동구릉을 자주 찾을 것이다. 기다려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설레고 뿌듯한 일인지....

동구릉은 조선 왕조의 흥망성세를 생생하게 전해준다. 한 왕조의 운명 속에 영욕의 시간을 살았던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나도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 2021년 동구릉문화제 우수상 수상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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