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는 언제까지나 끈기 있게 기다려야 한다. 사람은 일생을 두고, 그것도 할 수 있다면 70년 혹은 80년을 두고, 우선 꿀벌처럼 꿀과 의미를 모아야 한다. 그래야만 마침내 마지막에 겨우 열 줄 정도의 훌륭한 시를 쓸 수 있다. 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다. 시가 감정이라면 이미 젊은 나이에도 충분히 쓸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시는 경험이다. 한 줄의 시를 위해서 많은 도시, 많은 사람, 많은 책을 보아야 한다. 하늘을 나는 새의 날개를 느껴야 하고, 아침에 피는 작은 풀꽃의 고개 숙인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또 미지의 나라들의 길, 뜻밖의 해후, 멀리서 다가오는 것이 보이는 이별,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남겨 둔 어린 날의 추억, 물을 뿌린 듯이 고요한 방에서 보낸 하루, 바닷가의 아침, 바다 그 자체의 모습,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들과 함께 덧없이 사라진 여행길의 밤들, 그런 것을 시인은 회상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 그저 모든 것을 회상할 뿐이라면 사실 그것은 아직 아무것도 아니다. 하루하루의 밤이 전날 밤과 조금도 같지 않은 밤마다의 행위, 임신부가 부르짖는 소리, 새하얀 옷 속에서 푹 잠이 들어 그저 육체의 회복을 기다리는 산후의 여인, 시인은 그것을 추억으로 가져야 한다. 죽어 가는 사람들의 머리맡에 붙어 있어야 하며, 열어젖힌 창문이 바람에 덜컹덜컹 울리는 방에서 밤샘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러한 추억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 추억이 많아지면 다음에는 그것을 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다시 추억이 되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커다란 인내심이 필요하다. 추억만 가지고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추억이 우리의 피가 되고, 눈이 되고, 표정이 되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것이 되고, 이제는 우리 자신과 구별할 수 없게 되어서야 비로소 뜻밖의 우연한 순간에 시 한 편의 첫 단어가 추억의 한가운데에서 불쑥 솟아나고 그로부터 시가 시작하는 것이다.
릴케의 말테의 수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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